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 (문단 편집) == 수용소 생활 == 강제 수감된 이들은 빈약한 시설 속에서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일본계 '''미국인'''임을 증명하기 위해, 즉 '''조국 미국에 대한 충성을 입증하기 위해''' 새로운 환경에서도 열심히 일했다. 이들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식료품 및 생필품 외에도 군이 요구하는 전시물자 생산에도 적극 협력했으며 미국 역시 이들을 잘 써먹으면서 어느정도 자유로운 영내 행동을 보장하거나 학업 문제가 있다면 외박은 안 되더라도 외출을 허용해 주거나 의료 시설을 갖추는 등 기본적인 의식주 정도의 지원을 해 주었다. 그러나 수용소에 따라 마굿간 등에서 살아야 했던 곳도 있었다. 물론 엄연히 강제격리수용소다 보니까 주변에 철조망이 쳐지고 무장병력들이 경계를 서고 탈출 시도를 하다가 사살당하는 일도 벌어졌다. 국운을 건 [[총력전]]을 펼치던 유럽 국가에서야 진영을 가리지 않고 이 정도 조치는 일반적이었다. [[영국]]에 거주하던 6만여 명의 독일계 주민들도 반[[나치]] 인사들을 제외하고 수용소 생활을 하거나 거주지 제한 조치를 당했고 7,500명 이상의 주민이 추방되었다. 당시 시설이 [[베리]], [[리버풀]], [[맨 섬]]에 건설되었고 지금도 일부 시설들이 남아 있다. [[소련]]도 [[독소전쟁]]이 발발하자마자 볼가 강 하류에 거주하던 [[독일계 러시아인]]인 볼가 독일인들을 잠재적인 부역자들로 간주해서 [[중앙아시아]]로 강제이주시켰으며 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루어지던 [[고려인]] 강제이주 역시 같은 맥락이다. 하지만 당시 본토가 전장이 된 적이 아예 없는 미국과는 사정이 다르기에 같은 조건으로 보기는 어렵다. 미국은 국가의 존폐가 걸린 급박한 상황에서 타국과 전쟁을 한 적이 없고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 일본조차도 미국이 전선을 확대하는 것을 꺼려서 자신들과 협상할 것이라고 생각해 벌인 일이지 미국을 점령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. 애초부터 그러기엔 양국 간의 덩치 차이도 너무 크다. 게다가 강제격리수용소임에도 노동수용소마냥 전시물자 생산 등에 동원했던 것도 전후 이들이 비판받는 이유 중 하나다. 그러나 [[소련]]의 [[굴라크]] 같은 강제노동수용소는 아니었고 [[나치 독일]]의 [[아우슈비츠-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|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]]나 [[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|트레블링카]]와 같은 절멸수용소는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상술된 수용소들과 같이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이 자행된 [[생지옥]]은 아니었기 때문에 같이 비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. 개전 이전에 일본계 사진작가들 중에는 미국 사진계에서 주목받던 이들도 있어서 수용된 후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. 카메라를 가지고 들어갈 수 없었으므로 수용소 안에서 구할 수 있는 물품들로 사제 카메라를 만들어 계속 사진을 찍었다. 그리하여 앤셀 애덤스, 도로테아 랭 등의 유명 사진작가들도 이곳에 찾아와서 작품을 남겼기 때문에 그들의 수용소 생활에 대한 자료는 많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